자유게시판
2022 주일 설교(요약 6)
2024-01-05 07:45:12
박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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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7:21-23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0장 8절에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반석에게 명령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원망하며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분노의 마음으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물론 반석에서 물이 솟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사건으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기 뜻, 자기 생각으로 행동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절에서 자기의 신분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 바울은 아주 담대하게 자신의 신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바울은 오직 주님의 뜻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값으로 사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바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로만 주여, 주여를 찾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삶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자가 되어야 그 사람이 하나님나라 천국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 구원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천국이 있습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얻게 하고, 영혼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인 예수님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통해 예수님이 보여지고, 예수님이 드러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7:24-27

구약성경에서는 반석이 무엇일까요? 시편 18편 2절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했습니다. 그러므로 반석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약성경에는 반석이 무엇일까요? 베드로가 유명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의 대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반석이십니다. 사도 바울도 반석을 예수님으로 말씀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베드로도 반석을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4절에 “사람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여기서 산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 반석 위에 집을 건축한다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인생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생의 근본이 되고, 예수님이 삶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내 인생의 목표가 나를 통해서 예수님이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것이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의 영적 모습이고, 자세이며, 태도입니다.

그러나 반석 위가 아닌 모래 위에 집을 짓습니다. 평상시에는 괜찮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창수가 나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집니다. 남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모래는 무엇입니까? 세상입니다. 돈입니다. 세상 권세입니다. 지위입니다. 처음에는 완전하고 좋은 것 같은데 홍수가 나면 흔적도 사라집니다. 거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죄사함이 없습니다. 영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가서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가 죽으리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메시야 구세주로 믿지 않으면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를 사망입니다. 영원한 지옥입니다. 최고의 비참한 인생이 됩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

누가복음 17:11-19

고든 맥도날드가 사람의 영성에서 최고의 영성은 “감사생활”이라고 했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것입니다. 변함없이, 한결같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최고의 영성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에 즉시 감사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구원과 복을 받고 누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가는 중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홉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했던 사마리아 사람에게 구원을 선언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서 와서 어떤 감사를 했습니까? 첫째로, 예수님 만난 것을 감사했습니다. 12절에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사람을 만날 수 없습니다. 사람과 접촉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저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치유와 회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것을 감사했습니다.

둘째로, 부르짖음에 응답해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13절에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예수님 계신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시끄러웠습니다. 어지간해서는 소리쳐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를 기울여서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것을 감사했습니다.

셋째로, 치유와 회복에 감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명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다가 고침 받았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가 우리의 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구원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주십니다. 응답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치료해주십니다. 우리를 낫게 하십니다. 그러니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삭개오의 감사

누가복음 19:1-10

  여리고는 온화한 기후를 가진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옥한 곳이었습니다.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여리고를 신성한 땅이라고 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북부 해안 도시와 애굽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돈이 모여드는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성경학자 바클레이에 의하면 여리고는 가나안 땅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곳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여리고의 막대한 자금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삭개오였습니다. “삭개오”의 의미는 “의로움, 깨끗함, 순결”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세리장은 로마 정부가 관장하는 지역에 설치된 세금 징수처를 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세리장은 세리를 여러 명 두고 그 조직을 이끌면서 거둬들인 세금 중 일부는 로마에 바쳤습니다. 그리로 나머지는 자기 몫으로 챙겼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세리장은 반민족주의자였습니다. 때문에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항상 괴로웠습니다.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기쁨이 없었습니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삭개오에게 들려온 구원의 소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5절에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가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삭개오가 어떤 감사를 했습니까? 첫째로, 즐거워했습니다.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가 대단히 기뻤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급히 내려와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됩니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나눠주고, 갚았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감사를 행함으로 실천했습니다.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갑겠나이다.” 감사는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감사, 입술의 감사는 절반의 감사입니다.

  완전한 감사는 행함까지 가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거룩한 변화를 받아, 감사를 행함으로 실천했습니다.

권위가 있으셨던 예수님

마태복음 7:28-29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조성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때문에 하나님은 최고 권위자이십니다. 피조물인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최고의 권위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권위를 위임 받으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권위가 있었습니다. 29절에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권위를 사용하셨습니다.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생각하지 못했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어떤 권위가 있었기에 사람들이 놀라워했을까요? 첫째로,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28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장로들, 바리새인들이 전혀 할 수 없는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죄를 사하는 영생의 말씀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려내는 구원의 말씀이었습니다.

  둘째로, 치유와 회복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께서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최고 권위가 있으신 의사였습니다. 어떤 누구도 고칠 수 없고, 무슨 약으로도 회복될 수 없는 모든 병,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완벽한 치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온전한 회복이 있습니다.

  셋째로, 사랑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의 자리를 버리시고 이 땅에 사람으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와 허물로 죽은 인생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 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그를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교회에 대한 박해자였던 바울을 만나주시고, 그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사랑의 최고 권위자였습니다.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8:5-13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상수훈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산 위에서는 권위를 가지고 설교하셨습니다. 산 아래로 내려와서는 권위를 가지고 기적과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3절에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병이 깨끗하여 진지라.”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또 다른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하인은 종입니다. 하인은 노예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6절에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예수님께서 가서 고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백부장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8절에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말을 듣고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10)고 하시며 백부장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면 백부장의 이만한 믿음은 어떤 것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크게 놀라시고 그를 칭찬하셨을까요? 첫째로, 백부장의 믿음은 따뜻한 사랑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었습니다. 주인이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습니다. 그런 병든 하인을 위해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하인이었지만 그를 아들처럼 생각했습니다. 아들의 신분으로 살게 했습니다. 사랑의 믿음입니다. 

  둘째로, 백부장의 믿음은 자기를 끝까지 낮춘 겸손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고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주 큰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백부장의 겸손을 보시고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칭찬했습니다.

  셋째로, 백부장의 믿음은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8) 예수님께서 번거롭게 자기 집에 오시지 않아도 말씀만 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넉넉히 자기 하인이 나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가 됨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백부장의 믿음에 대하여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하시며 그의 믿음을 칭찬했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8:23-27

예수님께서 산에서 산상수훈의 설교를 마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셨습니다.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만히 계시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빨리 그곳을 떠나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셨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그 곳에 큰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24절에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곧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큰 광풍을 이겨내고 예수님께서 열어주시는 새로운 승리와 평강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의 동행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24절에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제자들이 만난 광풍의 현장에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동행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꾸짖어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급하게 깨웠습니다. 25절에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이것을 보면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만큼 광풍이 험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습니다. 26절에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만난 모든 광풍을 꾸짖어 주시기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꾸짖어 주심으로 모든 광풍이 힘을 쓰지 못하고 물러가고, 쫓겨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꾸짖으니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27절에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하더라.”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그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냐?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

마태복음 1:18-25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6절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시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리아의 남편은 요셉이었고,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로 태어났음을 말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 예수가 나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의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정확하게 말씀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미가 5장 2절의 말씀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메시야 그리스도께서 유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는데, 그 분이 곧 누구일까?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일까요? 인간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나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성탄의 은혜와 축복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은 숨어계십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뭡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나에게 찾아오신 최고의 은혜이며 축복의 사건입니다.

  둘째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그 분은 구주가 되십니다. 왜 예수님이 구주가 되실까? 그 분은 죄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마1:18)

  그래서 예수님께 죄사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하나님나라 천국이 있습니다.

  셋째로,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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