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2022 주일 설교(요약 5)
2024-01-05 07:41:14
박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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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세우신 예수님

마태복음 16:18

  6.25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돼서 1953년 7월 27일에 끝이 났습니다. 3년 32일 동안 전쟁을 했습니다. 137만 명의 인명 피해가 났습니다. 국토의 80퍼센트 이상이 폐허가 됐습니다.

  그런데 6.25 한국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충청남도 공주 땅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교회가 공주중앙감리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1952년 9월 7일입니다.

  그리고 2022년 9월 4일 주일이 되었습니다. 우리교회가 교회창립 7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교회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 받았습니다. 또 우리 교회를 통해 많은 가정들이 회복되었습니다. 현재에는 이 곳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예배 중에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치유와 회복을 받습니다. 영적인 소성함을 얻습니다. 하나님나라 천국을 준비합니다. 감동입니다.

  지난 과거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돌봄의 역사였습니다. 현재에도 우리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돌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래에도 우리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교회가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본질에 충실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본질에서 멀어지면 모든 것이 잘못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교회가 이제는 교회창립 70주년을 뛰어 넘어 영적 본질에 충실한 교회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로, 영혼구원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38절에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이 예수님의 소원을 풀어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선교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교회가 나누는 교회, 섬기는 교회,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눅6:38) 그러면 하나님께서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다음 세대를 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 자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다른 세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삿2:10)

  넷째로, 문화선교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문화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역할과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6:1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할 것을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해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13절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것은 두 개의 기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두 개의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시험에 드는 것은 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에서 구함을 받는 것은 시험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하나의 기도입니다.

  성경에서 시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긍정의 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은 건설적인 시험입니다. 복된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무조건 합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해서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복된 자리에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주는 시험입니다. 파괴적인 시험입니다. 영혼을 망가지게 합니다. 이와 같은 마귀의 시험은 물리쳐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악하고 못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시면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때에 마귀가 와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둘째로, 기도해야 합니다. 악한 마귀와 사탄을 물리치는 또 하나의 아주 강한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마귀가 물러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이 말씀을 바꿔서 말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시험에 들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런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에 마귀의 시험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장소에 처음부터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기회를 시작부터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마태복음 6:13

  주기도문의 마지막은 13절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입니다. 이 부분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아닙니다. 마태가 첨가한 부분입니다. 마태는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에서 예배 때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마지막에 영광송을 넣었던 것입니다. 마태의 의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으로 시작해서 하나님께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올려 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지배권으로 다스려지는 하나님나라를 뜻합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일터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이 실현되어서 그 나라가 하나님께 올려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권세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권세는 영원합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한량없는 기쁨과 감동을 줍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밝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주님께서 주신 권세와 능력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권세와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시기 바랍니다.

  영광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오직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뭡니까? 하나님께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은 “아멘”으로 끝이 납니다. 아멘은 반드시 꼭 그렇게 된다는 확신입니다. 믿음의 고백입니다. 간절한 기원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멘은 충성과 헌신입니다. 내가 직접 내 삶으로 기도하고 간구한 것을 이루겠다는 충성의 다짐이며, 헌신의 약속입니다.

  주기도문은 외우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또 주기도문을 예배나 모임을 마칠 때에 하는 순서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기도문이 실재가 되도록 내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성취를 위해 내 삶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마치면서 “아멘”이 들어간 것입니다.

  또 내 인생의 방향은 오직 하나님나라와 영광을 위한 바른 길을 가고 있나? 주기도문 맨 마지막 부분의 기도를 드리면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영적 나침반이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6:16-18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 피의 복음입니다. 그 예수님 보혈의 피로 허물과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영혼이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금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7절에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금식을 경건의 척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은 많이 경건한 사람이고, 금식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했습니다. 월요일에 금식했습니다. 목요일에 금식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경건을 인정받는 수단과 방법으로 금식을 이용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묻고 찾는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니라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내는 ‘외식하는 금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본래 목적에서 이탈한 금식을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15절에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렇게 금식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상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금식기도는 절박한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의 인생에 위기가 닥쳤을 때 장벽을 허무는 아주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진지하게 금식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닫힌 것을 열어주십니다. 묶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치유를 주십니다. 회복을 주십니다. 영적인 소성함도 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금식하며 기도하라는 감동을 주십니다. 그때에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금식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그 금식기도는 우리의 의를 위한 기도가 되면 안 됩니다. 자신의 공로를 쌓기 위한 기도가 되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바른 금식, 옮은 금식을 하시기 바랍니다. 18절에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6:19-24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 천국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나라 천국을 말씀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사도 요한도 하나님나라 천국을 말씀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3절에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사도 베드로로 하나님나라 천국을 말씀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1절에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나라 천국은 실재입니다. 하나님나라 천국은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나라 천국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20절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물은 재물입니다. 그리고 그 재물은 곧 돈입니다. 그 돈을 하늘에 쌓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돈은 어느 위치까지 이르렀습니다.“돈이 곧 하나님이다.” 여기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돈은 섬김의 대상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이 돈에 멀게 되면 돈이 하나님처럼 보입니다. 돈을 하나님처럼 섬겨요. 이와 같은 인생들에게 예수님께서 아주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통치자가 되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헌금생활, 봉헌생활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특히 온전한 십일조의 봉헌은 하나님만이 주인이시고, 하나님만이 왕이 되신다는 믿음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온 몸 전체를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마땅히 온전한 십일조의 봉헌을 반듯하게 해서 하나님 신앙을 바르게 세우고 표현해야 합니다.

  하늘에 쌓는 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쌓는 봉헌은 나를 위한 영적인 영원한 투자입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1

마태복음 6:25-34

  인간의 삶에 염려가 없는 날이 없습니다. 걱정이 없는 날이 없습니다. 근심이 없는 날도 없습니다. 날마다 염려입니다. 매일 근심입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걱정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무엇에 대하여 염려하고 근심할까요? 25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사람들이 염려하는 대부분이 뭡니까? 의식주의 문제입니다. 생명의 안전과 건강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까요? 걱정하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염려는 해롭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갉아먹는 무서운 두 개의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제에 대한 후회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일에 대한 염려입니다. 이 두 개의 적을 이기지 못하면 인생에서 행복은 없습니다.

  특히 염려는 모든 질병의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염려는 항암 인자인 킬러 세포를 죽여서 각종 암을 일으킵니다. 그만큼 염려는 해롭습니다. 우리의 몸과 정신을 병들게 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망가지게 하는 무서운 독소입니다.

  둘째로, 염려는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염려해서 키를 자라게 할 수 있다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염려해서 키를 크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염려한다고 해서 키는 자라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렇게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생명을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염려한다고 해서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염려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해결됩니다. 기도로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무익할 뿐입니다.

  셋째로, 염려는 다른 사람까지 전염시키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염려는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영적 질병입니다.

우리가 아주 신중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염려의 영적 질병을 앓습니다. 그러면 그 염려가 가정의 자녀들을 감염시킬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염려의 질병에 감염되면 그 자녀들이 일평생을 염려의 사람으로 삽니다.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의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그런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 봅니다.

  하나님과 기도와 깊은 묵상으로 영적 통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염려를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2

마태복음 6:25-34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민입니다. 그런 우리들은 염려의 사람이 아닙니다. 근심의 사람이 아닙니다. 걱정의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쁨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꿈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염려의 사람이 아닌 기쁨의 사람으로, 희망의 사람으로, 꿈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비결이 믿음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가지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하물며 너희일까보냐의 믿음입니다. 30절에 “오늘 있다가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 새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습니다. 창고에 모아들여서 쌓아 놓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 새들은 굻어 죽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새들을 기르시고 먹이신다고 했습니다.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입히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고상하게 입히셨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성민들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의 믿음입니다. 32절에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했습니다.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으므로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십니다. 아낌  없이 주십니다.

  셋째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의 믿음입니다. 33절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지 않는 것 까지 더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은 뭘까요? 내가 아주 확실하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예수님이 우선이고, 예수님이 먼저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전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 그러니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의 삶,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주 신중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염려의 영적 질병을 앓습니다. 그러면 그 염려가 가정의 자녀들을 감염시킬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염려의 질병에 감염되면 그 자녀들이 일평생을 염려의 사람으로 삽니다.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의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그런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 봅니다.

  하나님과 기도와 깊은 묵상으로 영적 통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염려를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7:13-14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나라 천국의 삶을 살다가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에 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3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했습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의 결과는 영생입니다. 구원입니다. 하나님나라 천국입니다. 반면에 넓은 문, 넓은 길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저주입니다. 영원한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구원의 완성을 위해 긴장해야 합니다. 각성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의 영적 생활을 점검하고 좁은 문,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첫째로,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 믿는 신앙생활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많이 어렵다고 생각된다면 그 사람은 좁은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희생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좁을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몸을 찢으셨습니다. 피를 쏟으셨습니다. 거룩한 희생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주님과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사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기쁨과 기대로 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좁은 문, 좁을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받고 누릴 영광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기쁨과 영광을 기대하며 오늘을 참습니다. 견딥니다. 인내합니다. 그리고 길을 변경하지 않고 줄기차게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의 길을 갑니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좁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한 숨 쉴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하나님나라 천국에 있습니다. 주의 길을 갑니다. 그 사람은 좁은 길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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