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
마태복음 5:27-30 |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것처럼 무서운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의 유혹과 시험입니다. 교만의 유혹과 시험입니다. 세상 권세와 영광에 대한 유혹과 시험입니다. 잘 이겨내야 합니다. 정신 차려서 물리쳐야 합니다. 그것들과 함께 더 무서운 유혹과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적인 유혹이며 시험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성범죄를 대단히 엄하게 다르셨습니다. 히브리서 13장 4절에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음행과 간음에 대하여 더 많이 강하게 심판하시고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적으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 성에 무서운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유황과 불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다윗이 30세에 유다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7년 6개월을 통치한 후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됐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통치했습니다. 그런 그가 밧세바 간음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책망했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0절에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러자 다윗의 큰 아들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성폭행했습니다. 후에 압살롬이 형 암논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서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다윗의 성범죄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가서 예수님은 너무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28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거룩한 삶, 정결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로, 아주 강력한 마음의 결심,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몸에서 눈을 빼내고, 손을 잘라내는 것 같은 결심과 다짐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세워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경건의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습니다. 듣습니다. 암송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검으로 악한 것, 불의한 것, 부정한 것을 쳐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 |
마태복음 18:1-7 |
예수님 믿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불러 세우시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절에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하셨을까요? 첫째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순수합니다. 어린 아이는 순결합니다. 어린 아이는 단순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가 하나님나라 천국에 참여하는 영적 요소 중에 제일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활은 뭘까요? 어른에서 아이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영적 순수함을 찾는 것입니다. 순결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잊었던 단순성을 다시 되돌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순수한 사람, 영적인 단순의 사람으로 살아서 하나님나라 천국에 합한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4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왜 어린 아이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될까요? 어린 아이에게는 교만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는 욕심도 없습니다. 그런 어린 아이처럼 교만의 사람이 아닌 겸손의 사람이 되고, 정욕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위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나라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우리에게 영적인 스승입니다. 어린 아이를 통해 믿음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겸손을 배워서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 크게 높임을 받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어린 아이들을 통해서 천국을 맛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우리에게 천국을 가르쳐 줄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천국을 맛보게 해줍니다. 이 땅에서 어린 아이들이 우리들에게 천국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어린 아이들이 우리에게 천국을 선물해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음이 기뻐집니다. 슬픔이 즐거움으로 바뀝니다. 근심, 걱정이 사라집니다. 웃게 됩니다. 이런 보배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요? 그 아기의 웃음소리, 그 아이의 눈짓, 그 아이의 몸짓, 그 아이의 사진 한 장이 엄청난 기쁨입니다. 어린 아이를 통해 이곳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다가 영원한 천국으로 거룩한 이주를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효를 행하신 예수님 |
누가복음 2:51, 요한복음 19:25-27 |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는 대신계명입니다. 그리고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대인계명입니다. 그런데 인간관계에 대한 계명 가운데 첫 번째가 부모공경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에 따라 효를 행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효자셨습니다. 그것도 지극 정성을 다한 효자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효를 행하셨을까요? 첫째로,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순종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51절에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했습니다. 또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해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순종했습니다. 둘째로, 위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의 현장을 어머니 마리아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찢어졌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6절에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위로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니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위로했습니다. 셋째로, 돌봄을 부탁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7절에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사도 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어머니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11년 동안 봉양했습니다. 부모에게 효를 행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5장 16절에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
가정을 통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 |
마태복음 1:18-21 |
우리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이 없었다면 우리의 존재는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가정에서 출발해서, 가정에서 삶을 살다가, 가정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출발과 삶의 과정과 마지막이 모두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결혼 관계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예수님께서 출생하셨습니다.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최고의 영적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복한 가정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적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가정에 가정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의 그 마음, 그 자세, 그 태도, 그 내용이 그대로 가정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찬송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가정교회가 세워지면 그 가정과 가족들이 받고 누리게 되는 특별한 은혜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정에 머물러 계시면서, 예수님이 절대권위자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통치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가족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의 통치와 인도를 받습니다. 그러면 그 가정에 영적 질서가 세워집니다. 안정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게 됩니다. 절대권위를 가지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 분은 창조자이십니다. 그 분은 보혈의 피로 인간의 죄를 정결케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십니다.(히1:2) 이런 예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가정이라면 그 가정은 하나님나라 천국입니다. 당연히 의와 진리와 평안도 항상 충만입니다. 우리는 가정이 깨지고 무너지는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가정이 어그러지지 않고 반듯하고 견고해질 수 있을까요? 가정교회가 세워지고, 머리이신 예수님의 절대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에 가정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절대권위자이신 예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 가정은 행복합니다. 질서와 규모와 평안이 있는 복된 가정을 이룹니다. 그 가정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신 예수님 |
마태복음 19:3-6 |
예수님께서 악한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라고 했습니다. 진리가 그 속에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거짓을 말하며,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요8:44) 그 마귀가 각 개인을 공격합니다. 또 마귀가 교회를 공격합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마귀가 가정을 공격합니다. 예수님 믿는 성도의 가정은 무엇입니까? 가정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성도의 가정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십니다. 그런데도 악한 마귀가 가정을 깨려고 거짓과 속임과 다툼과 분쟁으로 가정을 향해 덤벼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성해서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서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영적 사실이 있습니다. 6절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인간은 만남 속에서 삽니다. 부모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아주 중요한 영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남녀가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섭리적인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만남을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결혼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준비하심과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만남, 그 결혼, 그 가정은 사람이 함부로 나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외 조항을 두신 경우가 있습니다. 음행의 문제로는 이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신24:2) 사도 바울은 신앙의 문제에서 분쟁과 다툼이 있게 되면 갈라설 수 있다고 했습니다.(고전7:15) 이렇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다는 것, 그래서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영적인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을 견고하게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완제품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는 완제품이 없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함께 세워가고,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세워가고, 같이 만들어서 좋은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족함을 수용해야 합니다. 모자람을 수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가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으로 세워 가시기 바랍니다. |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신 예수님 |
누가복음 23:26-28 |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모습을 보고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예수님을 따르는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27절에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이들은 구경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애처로운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생각하며 슬피 우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28절에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앞으로 40년이 지나고 70년이 되면 예루살렘 성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어 망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자녀를 위해 울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위한 눈물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의 무엇을 위해 눈물의 기도, 무릎의 기도를 해야 할까요? 첫째로, 자녀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지 않습니다. 죄사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 끝은 어떻게 될까요? 지옥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영벌의 사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자녀의 영적 성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 성장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녀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나라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녀의 신앙계승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앙이 계승되면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반대로 신앙계승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세상으로 갔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신명기 8장 19절에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망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자녀들에게 신앙계승을 위해 눈물로, 무릎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 |
마태복음 5:33-37 |
처음으로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갈릴리 사람들”, “나사렛당”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불렀을까요? 안디옥 지역의 사람들이 볼 때에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자신들과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미친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정직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맹세할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하라고 했습니다.(출22:11) 그리고 하나님께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신23:23)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들이 맹세를 악용했습니다. 그래서 맹세를 하면 사람들이 믿어준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거나 사람을 속여서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때에 못된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겁이 났던지 하나님보다 높거나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히 규모가 있는 것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그것이 하늘이었습니다. 땅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머리로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37절에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하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 믿는 우리가 정직해야 할까요? 첫째로, 예수님께서 정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 9절에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는 거짓이 없었으나” 했습니다. 거짓이 아닌 정직으로 사는 사람이 진짜 예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잠언 15장 8절에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라” 했습니다. 더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11편 7절에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누가 하나님을 뵙게 될까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납니까? 정직한 사람입니다. 셋째로, 정직해야 세상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짓과 속임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가 정직하지 않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세상 사람들이 귀를 열지 않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와 애씀은 허탕이 되는 것입니다. |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 |
마태복음 5:38-42 |
우리에게 생명수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39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타락한 인간은 그 본성이 악합니다. 그와 같은 인간의 잔악성을 하나님께서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잘못한 사람에게 공정한 형벌을 가할 수 있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38)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의 정신, 긍휼의 은혜를 무시해 버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복수를 가르쳤습니다. 앙갚음을 하라고 했습니다. 손해를 본대로 보상을 요구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용서가 없습니다. 화해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과 사회가 너무 힘들어집니다. 강퍅한 세상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왼손이나 오른 손등으로 오른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뺨도 돌려대라고 했습니다. 왼뺨을 때리기 위해서는 오른손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맞는 사람을 동일한 인간으로 인정하는 처사입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인간의 동등성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지위도 찾을 수 있습니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주라고 했습니다.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니 채권자가 속옷을 가져갔습니다. 그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했습니다. 겉옷은 아주 중요한 생활의 도구였습니다. 그 겉옷까지 가져가니 채무자는 벌거벗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왜 벌거벗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그때에 채권자가 겉옷까지 가져갔다고 하면 사람들이 채권자를 책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채권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의 군장을 들고 가는 사람은 5 리가 아니라 10 리까지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로마 군인이 유대인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되고, 진정성이 있는 사과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복수하고 공격한다면 존중이나 존경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 조롱과 멸시를 퍼부은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한 사죄의 기도를 했습니다.(눅23:34)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았던 예수님을 따라 행함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고, 이 땅에 하나님나라 천국의 문을 활짝 여는 모든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께 감사하라 |
시편 136:4 |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서 진짜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씀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러므로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가 하나님의 뜻인데 왜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남과 비교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고,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항상 행복합니다. 모든 일에 행복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감사생활을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먼저 영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넣어주신 모든 마음, 정성, 힘을 다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고전14:15) 그리고 그 감사를 말로 표현하고 고백해야 합니다.(롬10:10) 그 다음에 예물을 드려 감사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 15절에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빈손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물을 드려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예물을 드릴 때에도 그냥 예물을 드리면 안 됩니다. 예물을 드리는 영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힘껏 드려야 합니다. 신명기 16장 10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원해서 드려야 합니다. 즐거움으로 드려야 합니다.(고후9: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이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지금도 여러분 앞에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이한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께 영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입술로 고백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힘껏 자원해서 즐거움으로 예물을 드리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크고 놀라운 기인한 일들을 행해주시는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가정 속에, 자녀들과 자손들에게, 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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