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2022 주일 설교(요약 2)
2024-01-05 07:24:58
박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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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35-39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이루는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몸을 찢으셨습니다. 거룩한 보혈의 피를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으면 누구든지 죄사함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나라 천국의 사람이 됩니다.

  과연 어떻게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구원의 사역을 넉넉히 감당하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께서 어떤 기도생활을 하셨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기도가 우선인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가 우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가 제일 먼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귀신을 추방했습니다. 베드로의 집에 가서 열병으로 누워있던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병자들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이 힘드셨습니다. 피곤한 안식일을 보내셨습니다.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35절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도 기도하시더니.” 예수님은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기도가 우선이며, 기도가 먼저인 삶을 사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새벽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35) 예수님은 기도의 거룩한 습관으로 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시간입니다. 한적한 곳은 하나님께 집중하기 좋은 곳입니다.

  이와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과의 교제와 소통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도를 통해 영적 충만을 얻으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벽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할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어제 안식일에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난 일들을 기대하며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8절에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문제의 해결자이신 예수님

마가복음 6:53-56

  히스기야는 유다나라의 열세 번째 왕입니다. 그의 나이 25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29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과 연합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켰습니다. 그런 히스기야에게 하나님께서 형통을 주셨습니다. 열왕기하 18장 7절에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그러던 어느 날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유다를 침략해왔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냈습니다.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모두 시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나라의 혼란과 위기가 극복되었습니다. 나라가 번성할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히스기야가 병들었습니다. 열왕기하 20장 1절에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아주 잘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에게 문제가 닥쳤습니다.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 히스기야가 누구일까요? 오늘 현재를 사는 우리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이지만 꽃길만 있지 않습니다. 힘든 가시밭길을 걷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잘못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서 할 만큼 했습니다. 그래도 새로운 문제가 터집니다.

  이때에 문제에 대한 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어떤 상황과 처지에 있든지 모든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 죄사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하나님나라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에서 왕 노릇하는 영광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답도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나인성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마가복음 6장 56절에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문제에서 우리를 성하게 하실 분, 우리를 고치실 분, 우리를 회복시키실 분, 우리를 낫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5:13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13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팔복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과 청중들입니다.

  세상의 소금은 뭡니까?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들의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로마가 희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인 바리새인들이 희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헬라 철학도 희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금은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하기에 세상의 희망이 되는 걸까요? 첫째로, 소금은 맛을 냅니다. 세계적으로 소금하면 첫 번째로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맛입니다.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데,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맛입니다. 그 맛을 내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소금입니다.

  그러므로 척박한 세상에서 즐거움의 맛을 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의 세상에서 감사의 맛을 내시기 바랍니다. 허무의 세상에서 가치와 의미의 좋은 맛을 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소금은 썩음을 방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바다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바닷물이 짭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이 다 바다로 모여들어도 바다는 썩지 않습니다.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소금이 썩음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세상의 썩음이 물러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소금은 갈증을 일으킵니다. 음식을 짜게 먹었습니다. 갈증이 일어납니다.  물을 찾습니다.

  운동을 했습니다. 몸에서 땀이 납니다. 땀은 대부분이 물입니다. 땀의 성분 중에 제일 많이 포함된 것이 염분입니다. 소금입니다. 그래서 땀을 많이 흘린 후에는 반드시 갈증이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인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영적 갈증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찾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 갈증을 느끼게 해서 예수님과 교회로 사람들을 오게 한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소금으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적 갈증을 일으키는 자로 살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5:14-16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설교를 하신 후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빛일까요? 빛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반사체로서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영원한 빛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으로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발광체로서의 빛은 아닙니다. 우리는 반사체로서의 빛입니다. 누구를 비추는 반사체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나로 인해서 예수님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빛의 역할을 더 자세하게 설명하시기 위해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산 위에 있는 동네 비유입니다.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등경 위의 등불 비유입니다. 15절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을 때 이 말씀에는 세상은 어둡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정말 세상은 어둡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세상 사람들이 악한 우상으로 갔습니다.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며 섬깁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은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런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드러내는 영적인 반사체인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빛으로 살 때 어떤 결과가 있게 될까요? 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빛의 살을 살면 그 결과가 뭡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존재 이유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을 보여주는 선한 빛으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의가 더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5:20

  세상의 가치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 것은 바뀝니다. 세상 것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세상의 의를 따라가면 구원은 없습니다. 영생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결코”는 헬라어로 “우메”(ού μή)라고 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아주 강한 부정입니다.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무서운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각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천국은 어떤 자격증이나 지위, 권세를 가지고 가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는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믿음의 의입니다. 믿음의 의는 뭡니까? 오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의를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큰 영적 착각이었습니다. 인간의 의로는 어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그런 인간에게 의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의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만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께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의이며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둘째로, 순종의 의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거룩해보였습니다. 매우 의로운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 앞에서는 아주 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말만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외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영적인 상태는 회칠한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모순투성이의 믿음을 거짓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은 천국과 관계가 없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의로 살면 안 됩니다. 외식적인 의도 안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답게 참된 순종의 의로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경영

잠언 16:1-3

  현대인의 질병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내적인 병 즉, 마음의 병이라고 합니다. 최근 가장 큰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우울증을 필두로 불안증, 불면증, 스트레스 등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 병들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무엇이고 마음은 왜 병이 생기는 것일까요? 마음은 국어사전에 보면 ‘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이라고 했습니다. 좀 더 세밀히는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감정이나, 의지, 생각 따위를 느끼거나 일으키는 작용이나 태도’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은 사람이나 사물을 평가하는 내 기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마다 마음이 다르니 올바른 평가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기자는 ‘마음의 경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경영은 히브리어로 ‘마라아크’라고 합니다. 그 어원은 ‘아라크’인데 그 뜻은 정리하다, 정돈하다, 배열하다입니다. 즉 경영은 우선순위를 잘 파악하여 순서를 잘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경영’은 주관적인 내 마음을 이성적으로, 또 감성적으로 잘 파악하고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서 기자는 마음의 경영조차 부족하다는 어조로 말합니다. 결국 그 말의 응답은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1절) 그러면 마음의 경영으로 부족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신앙의 시작이 마음의 경영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 내적인 것까지 감찰하십니다.(2절) 그런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엇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잠언서 기자는 우리에게 두 가지 마음의 경영을 제시합니다. 첫째, 행위입니다.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 행위를 통한 그 마음을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위탁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고 말합니다. 이 말인즉, 주님을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의지하는 일에는 반드시 믿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상황과 여건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석같이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마음의 경영이 필요합니다. 

화목하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5:21-26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 되십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기쁨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이와 같은 율법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은 사람들은 속으로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하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직접 이 계명의 진정한 의미와 해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22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서 노하는 것은 분노와 증오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형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 ‘라가’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라가’는 ‘머리가 텅 빈, 무가치한’그런 의미입니다. 사람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도 공회에 잡혀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분노와 미움, 증오, 멸시와 조롱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을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거친 욕은 마음의 표현이며, 그 마음속에 분노와 저주가 가득한 이상 그는 이미 벌써 살인자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는 더 무섭고 확실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형제를 미워하는 순간 이미 살인자가 됐습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빨리 분노와 악한 마음을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25절에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미움과 증오가 아닌 화해와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며 기도해서 용서와 화목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고난당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15:21-32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성육신의 고난입니다. 성육신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것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난입니다. 어떤 사람도 모방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둘째로, 삶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헤롯이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들을 죽였으므로 애굽으로 피신했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귀신을 추방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머리 둘 곳이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셋째로,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최고의 정점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셨습니다.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 계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벌거벗김을 당했습니다.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성육신의 고난, 삶의 고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를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없애주시려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소멸시켜 주시기 위해 상함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시려고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치료해주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로 허물과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구원 받았습니다. 영생이 사람이 됐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격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 대한 거룩한 전달자로, 증거자로 살아서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로 구원 받고, 화평을 누리며, 치유와 회복을 얻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해지기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8:1-10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절대로 잊어버리거나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잊어버린 순간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것은 잊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고 붙들었다면 그 사람의 영적 생활은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줄까요? 첫째로, 죄사함의 은혜입니다.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죄인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사망의 존재가 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가 사함을 받았음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사망을 이기는 은혜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지금까지 사망을 이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뭡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는 모든 사람도 동일하게 사망을 이기는 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기쁨입니다. 기다림입니다. 기대입니다. 

  셋째로, 구원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 여기서부터 하나님나라 천국의 삶을 살게 하는 은혜와 영적인 능력을 공급해줍니다. 현재적 천국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가시면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으로 옮겨집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왕 노릇하며 살다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부활의 새 몸을 입고 나오게 됩니다.

  넷째로, 부활에 참여케 되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예수님의 부활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 다음에 많은 부활의 열매가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3절에 “그러나 각각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런데 누가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될까요?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부활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여러분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예수님 안에서 부활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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