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2022 주일 설교(요약 4)
2024-01-05 07:35:00
박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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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의 초실절을 지키라

출애굽기 34:22-24

  모세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22절에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맥추의 초실절은 뭡니까? 농사의 첫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 제일입니다. 하나님 우선입니다. 하나님 먼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제일, 하나님 우선, 하나님 먼저의 맥추절을 지키며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와 복을 주실까요? 첫째로, 이방 나라들을 쫓아주십니다. 24절 앞부분에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여기서 이방 나라는 가나안 원주민입니다. 이들은 백향목 같이 키가 컸습니다. 상수리 나무처럼 단단했습니다.(암2:9)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쫓아주신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26장 8절에 “또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하나님께서 싸워주셔서 다섯이 백을 물리치고, 백이 만에게 승리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둘째로, 지경을 넓혀주십니다. 24절에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지경을 넓혀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대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왕성케 하십니다.

  아무리 사람이 수고하고 땀을 흘려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헛수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노력, 애씀이 허탕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로 절기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지경을 넓혀주시고, 번성케 하십니다. 잘되게 하십니다. 절대로 헛수고나 허탕이 없습니다.

  셋째로, 아무도 땅을 탐내지 못하게 하십니다. 24절 말씀을 전체적으로 다시 보면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 세 번 지켜야 할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장막절입니다. 그때에는 12세 이상의 남자는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그때에 대적들이 공격해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적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신다고 했습니다.

  시편 121편 7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하나님께서 감사의 사람, 감사의 가정, 감사의 나라를 지켜주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5:43-48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신 것으로 만족해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며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처럼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원수가 아닙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냥 박해자가 아닙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너희 원수는 누구입니까? 본인 자신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엄청난 곤경을 겪었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박해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 믿는 것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공격하고 핍박하며 아픔을 줬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했습니다. 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그러면 과연 원수 사랑이 가능할까요? 박해자를 위해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마귀는 속삭입니다. “원수 사랑, 그것은 이상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안 돼. 네가 감히 원수를 사랑한다고. 꿈같은 소리야. 너는 안 돼. 너는 못해.” 사탄의 소리입니다. 마귀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사람이야. 나는 네가 나를 닮기를 원한다. 너는 할 수 있어.” 성령님은 가능하다고, 성령님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의 음성을 듣고, 사탄을 좇아가면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을 따라가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리고 성령님은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님의 도움으로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

은밀한 구제를 하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6:1-4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하나 더 원수에게, 박해자에게 할 것이 있습니다. 4절에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아무리 원수이고, 박해자라 할지라도 그 원수, 그 박해자가 죽어가고 있다면 그를 구제해서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구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구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구제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1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를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구제, 형식적이 구제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구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구제를 하고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합니다. 2절에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 구제를 한 후에 나팔을 불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가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제를 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듣고 칭찬합니다. 높여줍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이미 영광이 돌려진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사람들에게 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오른손이 하는 것이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3절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것은 은밀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감춰진 구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숨겨진 선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구제를 기억하시고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은밀한 구제를 하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고 했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4) 여기서 “갚아주신다”의 헬라어는 “아포디도미”(ἀποδίδωμι) 라고 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구제를 왼손이 모르게 하여 어린아이에게 어머니가 젖을 물려주는 것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고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6:5-8

  유대인들 중에는 하나님께 잘못된 기도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잘못된 기도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참된 기도는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유대인들의 잘못된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5절에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기도 중에 잘못된 것이 중언부언입니다. 7절에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중언부언은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예수님께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6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골방은 창고입니다. 헛간입니다. 밀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골방은 어떤 정해진 장소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골방은 아무런 방해 없이 하나님과 내가 만날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아무리 태산 같은 문제라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크지 않습니다. 기도의 골방에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꼭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8절에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도는 하나님께서 모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아뢰고, 그래서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주기 위한 방법이며,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좋은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골방에서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예수님1

마태복음 6:9-1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 읽는 법은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찬송하는 법도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주기도문은 모범적인 기도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둘째, 주기도문은 간결합니다. 하지만 간결하고 짤막한 기도 속에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셋째, 주기도문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세 가지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입니다. 용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넷째, 주기도문은 완전합니다. 순서에 있어서 완전합니다. 내용에서도 완전합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고,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요? 주기도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기도는 어떤 미지의 신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응답하시는 인격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9)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 유대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고,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 불경죄가 돼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이 120번이 넘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들으십니다. 응답하십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를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예수님2

마태복음 6:9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어떤 순서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전심으로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자녀 된 우리에게 좋은 것을 공급해주시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9)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서 첫 번째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15절에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너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에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내 이름은 “여호와”이며, 그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며, 대대로 기억할 칭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높여드릴 수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을 거룩하게 성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높여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소중하게 여겨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완성자이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높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시편 96편 8절에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성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귀한 것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높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가정과 자녀들을 아래로 떨어트리십니다. 하나님께서 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끝도 없이 추락시키십니다.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

마태복음 6:9-10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8절에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요한복음 6장 40절에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해서 모든 사람들이 영생을 얻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는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벌써 성취가 됐습니다. 그러나 땅은 아직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10절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기도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소경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7절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품고 바디매오처럼 부르짖어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를 통해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도 부인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를 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그냥 순종이 아닙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들었고, 보았고, 알았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순종해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6:11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기도의 순서와 내용이 인간에게로 옮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주기도문을 보면 ‘우리’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11절, 12절, 13절) 인간을 위한 기도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기도에서 첫 번째가 일용할 양식에 대한 것입니다. 11절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하루의 일용할 양식은 날마다 필요한 양식입니다. 날마다 필요한 건강입니다. 날마다 필요한 생명입니다. 날마다 하루를 살 만큼의 돈입니다. 이와 같은 삶에 욕심은 없습니다. 진짜 하루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도움, 하나님의 공급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만족으로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의 기도는 현재를 사는 우리가 반드시 꼭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 기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진지하게 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현재의 세상은 여기서 더 많이, 더 높게, 더 크게, 더 넓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매일 공급하시는 일용할 은혜와 도움과 양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오히려 능력 없는 자, 무능한 자로 간주합니다. 진짜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말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이렇게 감으로 인해서 지구촌 전체가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도가 1도 올라갔습니다. 지구의 온도가 1도 올라가는데 과학자들에 의하면 4,000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지구 온도가 1도 올라간 것을 우리가 좀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200년 동안 매초마다 원자폭탄 4개가 터져야 지구 온도가 1도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지구 온난화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요? 과학자들은 100퍼센트 현재보다 훨씬 안 좋아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어디서 오게 되었을까요? 일용할 은혜와 양식으로가 아닌 더 많이, 더 크게, 더 높게, 더 넓게의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루의 일용할 양식, 일용할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고 욕심이 아닌 감사와 절제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용서를 기도하라고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6:12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2절에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에는 정해진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과연 이와 같은 한계가 없는 용서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마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 생각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면서 용서에 대하여 이렇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12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에는 우리가 약간의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보혈의 피 공로로 모든 죄를 용서 받았는데, 우리에게 무슨 죄의 용서가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은 맞지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직 아닙니다. 삶에서 얼마든지 생각으로, 감정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죄를 짓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하여 날마다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죄의 용서에 대한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일까?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죄의 용서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받았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죄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몸을 찢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과 은혜를 통해 죄의 사함을 받은 우리는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35절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죄의 채무를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큰 사랑을 기억하며 성령님의 도움으로 모든 사람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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