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의 광풍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곳에서 광인(狂人)을 만났습니다. 마가복음 5장 2절에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어떤 누구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통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를 지배하고 있던 귀신의 정체는 군대였습니다. 9절에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악한 귀신이 예수님께서 사정했습니다. 12절에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허락했습니다. 군대 귀신이 돼지 떼에게로 갔습니다. 돼지는 모두 이천 마리였습니다. 돼지 떼들이 바다를 향해 내리달렸습니다. 그 곳에서 돼지들이 몰사했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광인이 치유 받은 것에 기뻐하고 축하해야 하는데, 오히려 저들은 예수님께 그 곳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러자 광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9절에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왜 예수님께서 광인이었다가 온전케 된 그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을까요? 첫째로, 집으로 돌아가서 안식과 쉼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악한 귀신에게 지배를 당했습니다. 그런 그는 가족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사람이었지만 인간으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광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광인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집에 가서 안식을 누리고, 쉼을 누리고, 평안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며 사람다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집에 가서 가족에게 예수님을 전해서 가족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광인의 부모는 그 동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힘들었습니다. 광인이 된 아들을 보며 절망과 한숨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광인을 치유하셨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집으로 가서 자신이 어떻게 고침 받았는지를 가족들에게 알리고, 부모를 위로하고, 가족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온 가족의 구원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멈출 수 없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한 치유와 회복의 예수님을 모든 가족들에게 전하고 증거해서 온전한 가족 구원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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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장 25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안타깝게도 이 여인은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혈루증을 앓았습니다. 혈루증은 여성이 하혈을 하는 병입니다. 이 여인은 치료 방법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안 해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12년 혈루증에서 나음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이 여인에게 치유와 회복이 있게 되었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17절 앞부분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했습니다. 들은 것이 이 여인에게 복이 되었습니다. 들은 것이 치유와 회복의 출발선이 되었습니다. 들은 것이 기적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소문을 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좋은 소문을 내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27절 중간에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했습니다. 12년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께 오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혈루병 여인이 혼자 예수님께 오는 것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내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병이 있는 곳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 앞에 있는 장애물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예수님께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와야 합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28절에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것은 위대한 모험이었습니다. 만일에 이 여인의 혈루병이 발각되면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돌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을 만졌는데 예수님께서 옷을 만진 여인을 내치시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을 만지면 12년 혈루증이 낫는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여인이 예수님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그 여인의 믿음대로 12년 혈루증에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그 여인에게 평안을 선언하셨습니다.“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34)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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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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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장 28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교회는 거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혈의 피로 사신 교회는 거룩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다툼이 있습니다. 분쟁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의 결과는 대단히 무섭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을 입고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있습니다. 17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누구를 불러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까?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님은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어디로 부르실까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부르시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뭡니까? 교회는 영적인 병원입니다.
때문에 교회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재림해오실 때까지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께로 갈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배워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죄인일까요? 우리의 죄인의 수준은 세리 레위보다 훨씬 더 많이 높습니다. 14절에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나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세리 레위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레위는 마태였고, 이 마태가 구세주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마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받은 구원과 은혜를 마태처럼 잘 증거해서 많은 죄인이 구원 받는 은혜와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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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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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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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26절에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8절에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그리고 31절에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첫째로, 참새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29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31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참새고기를 먹었습니다. 참새 가격은 한 앗사리온에 두 마리였습니다. 한 앗사리온은 로마의 동전으로 1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하루 노동자의 품삯을 5만원으로 계산했을 때 3천원입니다. 아주 작은 액수입니다.
그런데 한 앗사리온에 두 마리를 살 수 있는 참새, 그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참새조차도 잡혀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은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무관심으로 내버려두실까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살피십니다. 하나님께서 고난과 역경에서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머리카락까지 세시기 때문입니다. 30절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하나님께서 머리카락을 세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주 세밀하게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은 내 몸에 붙어 있지만 내가 그 숫자를 모릅니다. 몇 개가 빠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다시 몇 개가 새로 솟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머리카락 수를 아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너무 정확하십니다. 섬세하십니다. 오차가 없습니다. 틈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눈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품 안에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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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고 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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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21-24, 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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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는 열두 살 소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에게 말했습니다. “달리다굼.” 그러자 죽었던 열두 살 아이가 살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삶에도 새로운 시작과 출발의 달리다굼이 있게 될까요? 첫째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셔서 바닷가에 계셨습니다. 그때에 가버나움의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회당장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아주 높은 신분과 위치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22절에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했습니다. 사회적 존경과 명예를 가진 회당장이 왜 예수님께 이렇게 했을까요? 그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린 딸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할 수 있는 수고는 모두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살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제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우리의 모든 체면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와서 문제의 보따리를 풀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열어주십니다.
둘째로, 간곡히 구해야 합니다. 23절에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엎드려서 간곡하게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간절함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절박함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을 향해 가셨습니다. 24절에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예수님은 우리의 간곡함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간절함을 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간곡함에 응답하십니다.
셋째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간곡한 초정을 받으시고 그의 집을 향해 가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2년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혈루증 여인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때에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야이로가 예수님께 불평과 원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믿기만하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은 소녀에게 “달리다굼” 했습니다.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았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곳에 치유와 회복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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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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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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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나라 천국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9절에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하나님나라 천국의 말씀을 잘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뭘 들어야 할까요?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밭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밭에는 4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로, 길 가와 같은 마음의 밭이 있습니다. 3절에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여기서 길가와 같은 마음의 밭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름만 그리스도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가져갑니다.(15)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항상 먼저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각성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둘째로, 돌밭과 같은 마음의 밭이 있습니다. 5절에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이때에 돌밭과 같은 마음 밭을 공격하는 것이 뭡니까? 육신과 정욕입니다. 육신과 정욕대로 살면 그 사람의 마음은 돌밭입니다. 거기에는 선한 열매가 없습니다.
셋째로,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의 밭이 있습니다. 7절에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여기서 가시떨기는 구체적으로 뭡니까? 세상의 염려입니다. 재물의 유혹입니다. 이런 것들을 한마디로 하면 세속적 가치입니다. 세속적 가치로 채워진 마음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넷째로, 좋은 땅의 마음의 밭이 있습니다. 8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예수님은 좋은 밭의 마음을 이렇게 해석해주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 20절에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여기서 우리가 아주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눅8:15)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잘 듣고 지키면 거기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습니다. 말씀을 지키며 사는 곳에 풍성한 열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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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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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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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헤아리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비판은 정죄하는 것입니다. 심판하는 것입니다. 고소하는 것입니다. 헤아리는 것은 재는 것입니다. 측량하는 것입니다.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든 비판, 헤아림의 기준이 뭡니까? 자기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비판하고 헤아리는 것입니다. 자기 지식으로 공격하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으로 평가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비판과 헤아림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왜 비판하면 안 될까요? 무엇 때문에 헤아리면 안 됩니까? 첫째로, 나도 비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2절에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런데 우리의 비판과 헤아림으로 우리는 누구에게 비판과 헤아림을 받게 됩니까? 주님께로부터 입니다. 이때는 피할 수 없습니다. 숨을 수 없습니다. 도망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나하나 털어내시는데 그 죄송함과 송구함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입이 천개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 5절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율법에는 이 여자를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습니다. 이때에 돌로 치라고 하면 사랑이 없는 예수님, 용서가 없는 예수님, 자비가 없는 예수님이 됩니다. 또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모두 흩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1절에“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셋째로, 비판 받는 그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을 세워서 비판하며 비난하는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보혈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감히 비판합니다. 비난합니다. 험담합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심지어는 저주하며 정죄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이 맞습니다. 축복만 하는 것이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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